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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일기 from 최인호 - 2

미소띠움 2008. 5. 6. 16:34


1. 젊었을 때는 수많은 선배들을 만났으며 또 친구들을 사귀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고마운 후배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상한 결백증이 있었다.
사람과 친해져서 하루라도 못 보면 못 살 것 같은 우정의 열정이 연애 감정처럼 솟구쳐 올라도 곧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질없다, 부질없는 일이다. 하고 이를 부정하는 마음이 자리 잡곤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벗을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 26세로 요절한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친구들이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이는 날.
이날은 꽃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하고 노닌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젊은 시인이 어찌 그런 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을까.
요즘 나는 아내에게서 내가 평생을 통해 사귄 단 한의 친구와 같은 우정을 느끼고 있다.

"부부는 20대에는 사랑으로 살고,
30대에는 서로 정신없이 살고,
40대에는 서로 미워하고 살고,
50대에는 서로 불쌍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감사하고 살다가,
70대에 이르러서는 서로 등을 긁거 주면 산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내가 산에 사는 사람,
즉 산중인임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산으로 내가 갈 수 없으면 산이 내게 오게 할 수 밖에.
청산이 내게로 느릿느릿 찬아오게 할 수밖에.

3. 좋은 아버지는 누구인가?
나는 이미 아이들에게 엄격한 아버지가 될 자격을 잃었다.
엄격한 아버지야말로 가족에게 자유와 평화를 줄 수 있다.
엄격한 아버지는 얼핏 보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는 아이들의 생애에 깊은 빛을 준다. 그리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을 두고 두고 아버지의 빛 속에 머무르게 하면서 그들을 밝은 광명 속으로 계속 살아가게 할 것이다.

4. 모든 중독은 자유의 박탈이며 구속이다.
설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요즘 나는 비로소 내가 심각한 삶의 중독으로부터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5. 자세가 바르면 정신이 바르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자세가 바르면 정서가 불안할 수가 없다.
오늘날 젊은이들, 대학생들이 5층 석탑과 같이 단정히 앉아서 사물을 정면으로 당당히 바라보는 직시의 혜안을 갖추게 된다면 그 앉은 자세 하나만으로 정신이 바로 서고, 정신이 바로 서면 도덕이 바로 서고, 도덕이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그 뿐이랴.
나는 거의 모든 스님들이 걷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다.
내가 본 스님들의 걸음걸이는 모두 활달하였다.
그것은 규율에 익숙해진 육사 생도의 절도 있는 걸음걸이와 달리 모두 제멋대로 였으면서도 거침없었다.

6.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7. 나는 요즘 그만 놀고 친구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내가 살아온 담장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거기 지난 삶의 마당에 한 잔이 찻잔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얼마 남지 않은 찻물이 햇살에 반짝이며 한 점의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다.

-출처: 최인호, <산중일기>, 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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