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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Diary

산중일기 from 최인호 - 1

미소띠움 2008. 5. 6. 16:20


1. 고 3인 아들이 동생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낯익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할 때 낯익혔다고 해도 아는 것은 아니므로 실제로 시험을 보면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부를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그 말 한마디가 요즈음 내 마음 속에서 하나의 화두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2. 나는 요즘 천천히 글을 쓰고 싶다.
이것은 요즈음의 인생을 설계하는 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다.
나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 내리는 글을 쓰고 싶다. ...
내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마치 옛날의 스님들이 경판을 새길 때 한 자의 글을 새기고 절을 삼배 올리고, 한 권의 경전을 새기고 목욕재계하였던 것처럼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글뿐 아니라 삶 자체도 그렇게 변화해서 살아가고 싶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천천히 차를 몰고, 천천히 책을 읽고, 천천히 밥을 먹고, 천천히 잠을 자고, 그러나 그 천천함도 지나치지 않게. ...
우연히 들었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제1악장이 요즈음 내 삶의 화두를 이루고 있다.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그렇다.
내 삶을 작곡한 하느님이 지휘자인 내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 뿐이다.
나는 그 작곡가의 숨은 뜻을 따라가며 연주하듯 살아가야 할 것이다.

3. 밖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아내로부터 인정을 받는 남편은 드물다.
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더불어 온전한 인격 속에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손과 발이 닳을 때까지 노동으로 밥을 벌어먹으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마치 하나의 낡은 의복이 불에 타 사라지듯이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현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나의 엄격한 수도원인 셈이다.
그 가정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은 이미 종신서원을 약속한 수도자들인 것이다.
가족이라는 수도원에서 우리는 일상을 공유하며 사랑을 수양하고 있다.

4. 언젠가 한번은 300회 기념 자축연에서 아들 도단이 녀석이 이렇게 시건방을 떨었다.
"제가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거의 친구처럼 지냅니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아버지는 정신연령이 좀 낮은 듯하고요.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도 더 어립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잘 돌봐 줘야 할텐데..."
시건방진 도단이의 말 그대로 나는 집에서 가장 유치하고 정신연령이 낮은 저능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여전히 내 스승이자 부처님들이다.
어쩐지 나는 그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5.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없다.
나쁜 말 한마디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나쁜 결과를 맺으며 좋은 인연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이 어디엔가 씨앗으로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출처: 최인호, <산중일기>, pp.2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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