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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서방세계

미소띠움 2008. 9. 3. 11:56

'러시아의 재부상을 바라지 않는 서방의 일부 세력들이 러시아에 불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글레프 이바센초프 주한 러시아 대사가 국내의 한 중앙지와의 인터뷰에 털어놓는 불만입니다.
"CNN, BBC 등 서방 언론이 국제여론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국제사회의 여론을 러시아에 불리하게 몰아가고 있다.
이는 서방이 (소련 해체 직후 나약했던) 1990년대 러시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전후 유럽 역사를 읽으면서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1. 2차 세계 대전 중에 가장 큰 군사적 손실을 입은 나라는 860만 명의 무장 남녀를 잃은 것으로 판단되는 소련이었다. 반면에 독일군의 사상자는 400만 명이었다.
이는 독일이 전쟁 이전 주민의 8분의 1을 잃었음을 뜻한다.
특히 소련의 손실에는 전쟁 포로가 포함된다.
독일은 전쟁 중에 약 550만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중 4분의 3이 1941년 6월에 소련을 공격한 이후 7개월 동안 포로가 되었다. 이중 330만 명이 독일의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유기, 학대로 사망하였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러시아인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러시아인보다 더 많았다.
1941년 9월 독일군이 키예프를 점령했을 때 포로가 된 75만 명의 소련군 병사들 중에서 독일의 패전을 살아서 목격한 사람은 겨우 2만 2,000명에 불과했다.
소련도 350만명(대체로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루마니아인, 헝가리인)을 전쟁 포로로 잡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종전 후 집으로 돌아갔다.


2.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이 중부 유럽과 동프로이센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대부분 독일인이었던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은 소련군에 앞서 피신했다.
미국 외교관인 조지 캐넌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소련군의 진주로 이 지역에는 현대 유럽인들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재앙이 닥쳤다. 존재하는 모든 증거로 판단할 때 그 지역의 상당 부분에서 소련군의 최초 통과 이후 생존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러시아인들은 ... 아시아 유목민들의 시대 이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원주민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주된 희생자들은 (혹시라도 남아 있었다면) 성인 남성과 연령 불문의 모든 여성이었다.

3. 전쟁이 끝났을 때 과거에 소련과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의 시민이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귀국하느니 차라리 독일의 임시 수용소에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다.
소련 시민들은 설령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더라도 서유럽에서 잠시라도 머무른 자들에게 보복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발트 사람들과 우크라이나인, 크로아티아인들은 명칭에서는 아직 아니었지만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국가로 돌아가기가 내키지 않았다.
1945년과 1946년 내내 서유럽 당국들은 그러한 감정을 대체로 무시하고 소련과 여타 동유럽 시민들의 귀국을 때때로 무력을 동원하여 강요했다.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에 서방연합국이 돌려보낸 소련 시민은 227만 2,000명이었다.

4. 1953년까지 총 550만 명의 소련 국민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송환된 자들 중 다섯에 하나는 결국 사살되거나 굴라크(Gulag)에 보내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곧장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노동 부대에 배치되었다.

강제 소환은 1947년에 가서야 중단되었다. 냉전이 시작되고 소련 진영 출신의 추방 난민을 정치적 망명자로 대우하려는 의지가 새로운 출현한 덕분이었다.

5. 유럽대륙에 쐐기를 박아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쪼개 버린자는 히틀러였다.
적어도 스탈린만큼은 했다.
중부 유럽의 역사, 다시 말해서 독일 제국과 함스부르크 왕국의 영토, 옛 오스만 제국의 북부 지역, 차르 러시아의 서쪽 끝 영토의 역사는 서유럽 국민 국가들의 역사와 언제나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성격까지 꼭 달랐던 것은 아니다.
1939년 이전에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크로아티아인, 발트 사람들은 프랑스나 저지대 국가들의 운 좋은 주민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에 버금가는 번영과 안정을 희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루마니아인들은 파리를 꿈꾸었다.
1937년에 체코와 경제력은 이웃한 오스트리아인을 능가했으면 벨기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6.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엘베 강 동쪽에서는 소련과 현지의 소련 대리인들이 이미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된 아대륙을 상속했다.
부크레슈티와 소피아,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의 옛 통치자들에게는, 심지어 프라하의 통치자에게도 미래는 없었다. 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나치의 폭력으로 소멸되었다.
새로운 질서가 회복 불능의 과거를 대체해야 했지만, 사라지지 않은 나치의 폭력이 새로운 질서의 정치적 형성을 결정했다.

-토니 주트, <포스트워 1945-2005 1>, pp.4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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