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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미소띠움 2009. 10. 15. 16:22


알랭 드 보통의 글은 항상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이번에 나온 그의 신간도 국내의 일간지에서 대서특필하기에
독자의 입장에서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좀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몇 대목을 옮겨보았습니다.
'일'에 대한 그의 책에는...

#1.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런 태도는 그후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그리스 철학자에게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기형을 낳는다고 보았다.
시민은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얻어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할 때만 음악과 철학이 주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생각에 이어 초기 기독교는 일의 괴로움이
아담의 죄를 씻는 데 어울리는 확고부동한 수단이라는 더 어두운 교리를 보탰다.
르네상스가 되어서야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예술가들,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의 전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실용적인 활동의 영광에 대한 언급을 만날 수 있다.

#3. 이런 재평가는 처음에는 예술적 활동, 그것도 가장 찬양받는 예들에만
한정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작업을 끌어안게 되었다. ...
결과적으로 18세기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식을 뒤집은 셈이다.
이 그리스 철학자가 여가와 동일시했던 만족은 이제 일의 영역으로
옮겨갔으며, 아무런 경제적 보답이 없는 일은 모든 의미가
빠져나가고 퇴폐적인 딜레탕트의 우연적인 관심이나 받는 대상이 되었다.
일에 대한 태도의 이런 진화는 흥미롭게도 사랑에 관한 관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 지금보다 더 위계적이었던 사회에서는 개인의 운명이 대체로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다.
성공과 실패가 나는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선언을 동반한 실력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능력주의적인, 또 사회적 이동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지위는
자신감, 상상력,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을 설득하는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출세를 할 가능성 때문에 금욕과 체념의 철학들은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시끄럽게 부추겨대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자신이 저급하다도 믿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겠다는 의지> 같은 제목이 붙은 책을 고자세로 경멸했다가
필생의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비관주의적 자부심 때문에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5. 나는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 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6.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운명에서 갈망과 오류를 위해 마련된
자연스러운 자리를 부정하여,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목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이레, pp.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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