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띠움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본문

Diary/Diary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미소띠움 2007. 10. 2. 11:12


흔히 존경할 만한 부자가 없다고 푸념하지만, 사실은 존경할 만한 부자가 없는 게 아니라 존경할 만한 부자를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꿈꾸며 구십 평생을 헌신한 이종만도 그중 한 분이다.

1885년 울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약관의 나이에 지혈제 옥도정기(沃度丁幾. 요오드팅크)의 원료로 사용되는 미역을 매점했다가 조기에 종전되는 바람에 첫 실패를 맛본 이후, 어업, 임업, 광업 등 갖가지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손대는 일마다 족족 실패했다.
1937년 쉰세 살의 나이로 '금광왕'에 등극할 때까지 이종만은 33년간 무려 스물 일곱 번이나 실패를 맛보았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큰 광업 회사인 '대동광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공익사업에 착수했다.
27번 실패하면서도 28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품은 꿈 때문이었다.
이종만은 대동광업에서 해마다 나오는 엄청난 이익금을 쏟아 부어 교육과 문화 그리고 자영농 육성 사업을 왕성히 전개했다.

자영농 육성을 위해 이종만은 '대동농촌사'라는 재단법인을 세우고 수확물의 7할을 농민이, 3할을 재단이 가지도록 했다.
30년 뒤에는 농민이 수확물 전부를 가지는 대신 토지 소유권만은 재단이 갖게 했다.
농민에게 소유권을 양도하지 않은 이유는 농민이 일시적 충동으로 토지를 저당 잡히거나 팔아서 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재단이 거둔 3할의 소작료는 토지를 늘리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런식으로 조선 토지를 몽땅 사들이면 농민 전체가 자영농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종만이 더 큰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조선의 크나큰 불행'이라고 말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는 부를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그에게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였기에 해방 이후 자본가 신분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의장을 지냈고,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아흔세 살을 일기로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북한의 피폐한 경제 현실을 고려하면 이종만의 마지막 사업도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그의 꿈만큼은 여전히 소중하고 아름답다.

'Diary >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당신께 전하는 잃음에 대한 짧은 생각  (0) 2007.10.09
있는 모습 그대로  (0) 2007.10.08
햇살에게 맡기다  (0) 2007.10.01
초연의 법칙  (0) 2007.10.01
아주 특별한 일요일  (0) 2007.09.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