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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교훈 by 벤저민 그레이엄

미소띠움 2009. 2. 14. 17:14


가치투자이론이라는 신 영역을 개척한 벤자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의 평생에 대한 회고로부터 주목할 만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로 어머니에 대한 회고 부분을 옮겨 보았습니다.

1. 내게 남아있는 생생한 기억은 학교의 교단 뒤의 유리창에 새겨져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명예와 수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생겨난다. 네 맡은 바를 잘하면 그곳에 명예가 있으리."
-알렉산드 포프

2. (벤저민 그레이엄은 8세때 부유한 유태인 사업가였던 35세의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 세 명 레온, 빅터 그리고 벤자민이 남게 됩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하룻밤에 지나자마자 강인함과 융통성, 살아가는 지혜를 하나씩 터득해 나갔다.
어머니는 해야 할 일은 무엇이든 했다. 그녀에게는 가장 힘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부엌바닥을 닦는 일조차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없는 채로 살았고,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3. 내 짐작으로는 어머니와 우리 삼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한동안 한 달에 약 75달러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것 같다.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리사와 가정부, 불어 가정교사를 두었던 고급 주택의 여주인이었던 어머니에게는 대단한 영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가식도 필요 없는 백합 같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내 기억에 어머니는 당당한 여자였다.
어머니는 아들들을 자랑스러워 했으며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때가 되면 우리들이 집안의 부를 모두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운을 내고는 했다.

4. 사실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보다도 더 우리를 믿었다.
내가 고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직장에 다니고 있던 형들은 주당 10달러 이상을 벌지 못했다. 그때 한 신문에 미국의 평균적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남은 생애 동안 주당 30달러를 번다면 매우 만족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그런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주당 30달러는 벌기가 쉽지 않은 꽤 많은 봉급으로, 그 정도면 상당히 만족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우리를 나무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우리들의 야망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무척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5. 어머니는 배우고 공부하는 일을 매우 존중했다.
어머니가 모범을 보여주지는 않았다고 해도 내게 해준 조언은 내가 지적 능력을 기르는데 끊임없는 격려와 용기가 됐다.

6. 어머니는 또 우리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그녀의 독립심과 용기, 카드놀이에 대한 애착이 모두 한 몫을 했다.
1944년 10월의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웨스트 엔드 애비뉴의 친구 집에서 피노츨 게임을 했다. 이날 밤 12시가 지나서 어머니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중에 어머니는 도독을 만나 손가방을 강탈당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자신이 도독에게 손가방을 주기를 거부했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도독은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손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어머니는 머리에 골절상을 입었고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손가방에는 3달러가 들어 있었다.
범죄자를 만났을 때 그녀는 순순히 내주기를 거부했다.
3달러조차도 말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전 생애 동안 불의와 부당함에 싸웠듯이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 같은 환경에서 비극이었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가졌던 오직 하나의 두려움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장기간의 투병이나 무기력한 노년이었다.
이런 참을 수 없는 치욕을 어머니는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이 감내한 고통의 세월 대신,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그처럼 격렬한 임종을 선택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 아래의 대목은 '벤저민 그레이엄'의 자서전 서문을 쓴 UC버클리의 세이모어 차트만 교수의 서문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1. 나는 세 번째 아내인 말로를 만난 이후 이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우월감을 덜 가지고, 더 인간적이어야 할 필요성을... 60세가 넘어서야 그는 정서 계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사랑을 인생의 한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참된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세이모어 차트만(UC 버클리)

2. '삶'과 '일', '사적인 것'과 '직업적인 것', '감정'과 '사고'의 구분은 일생 동안 그레이엄의 마음을 사로 잡은 문제였다.
프로이트는 아니었지만 그도 노년이 되자 세계를 경제적으로, 또 금융인의 시작으로 이해하려는 그의 사고방식과 조화를 이루기위해 정서적 지혜를 더 추구했다.
이러한 추구의 한 부분은 그를 이성과 가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이끌었다. ...
우리가 그레이엄의 성격에 관해 최종적으로 재발견하는 것은 그가 책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 특히 실수로부터 배우려고 했던 일생 동안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이모어 차트만(UC 버클리)

-출처: 벤저민 그레이엄, <벤저민 그레이엄>, p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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